봉선화의 추억 - 이종화(진해 기적의 도서관장)

서재필 선생의 생가에 갔다가 오래 된 돌담 밑에 핀 봉선화를 보았다. 어릴 때의 추억이 떠올랐다. 봉선화 물을 들이느라고 손가락을 챙챙 감고 자던 여름밤에는 늘 잠을 설쳤다. 모기장 속에서 자다 깨다 해가며 보내는 한밤은 무덥고 지루했지만 빨갛게 물든 손톱을 조마조마 열어보는 아침을 기다리며 그런 밤을 군소리 없이 견디어냈다.

꽃잎과 이파리를 짓이겨서 거기에 백반 가루와 소금을 알맞게 배합해 놓은 다음에 손가락을 싸맬 피마자 잎사귀며 흰 헝겊과 실 등을 장만하느라고 초저녁부터 부산을 피웠다. 두 손을 깨끗이 씻고 주일학교에 가서 기도할 때만큼이나 경건한 마음으로 봉선화 물을 들이는 그 행복한 의식을 치르곤 했다. 제발. 언니 손톱에다는 나보다 미운 빛깔로 물들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가며.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애수에 젖은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눈물겨운 봉선화의 모습을 생각한다. 화려하지도 소담하지도 못한 작달막한 꽃나무. 외래 꽃들의 야단스러운 꽃무더기에 가리어. 있는 둥 마는 둥 꽃밭 한구석에 숨어 서 있는 가련한 꽃. 어느 길섶에 피어난 이름 없는 한 송이 풀 꽃 모양 향기 없고 볼품없는 이 꽃을 그래도 잊지 않고 사람들은 사랑해 왔다. 안방의 여인들이 사랑하고. 홍난파와 같은 음악가도 또 어떤 독립투사도 한결같이 봉선화를 사랑한 것은 원한에 맺힌 이 땅의 민족혼 때문인가. 서러운 민족은 서러운 꽃을 사랑하고 서러운 노래를 사랑하며 스스로를 달래야만 했기 때문이었을까.

긴긴 여름 한 철을 불볕 아래서 참고 견딘 봉선화의 작은 꽃잎이 시들어 땅에 떨어진다. 손끝으로 톡 건드리기만 해도 씨 주머니에서 와르르 터져 나오는 작은 씨앗들. 새까만 들깨 모양으로 생긴 그 수많은 씨앗을 조심스레 한 손에 받아 들고 봉선화의 애달픈 모습을 눈에 선선히 그려본다. 꽃나무는 죽어도 다시 피어날 씨앗의 신비. 죽음이 죽음으로서 끝나지 않는 삶의 연속. 슬픔이 슬픔 그것으로 종결되지 않을 우리들의 인생살이...

나는 상념에서 깨어나 새까만 씨앗들을 봉투에 쓸어 담는다. 내년 여름에는 우리 도서관에 오는 꼬맹이들에게 어릴 적 내 할머니가 해 주셨던 것처럼 예쁜 봉선화 물을 들여 주며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