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애들아 책과 놀자
나는 혈액형 A형의 전형으로 소심하고 여려서 낯선 사람들 앞에서는 몹시 긴장하고 떨었다. 형제들은 항상 나에게 ‘부모님 빽 믿고 이 불 속에서만 활개친다’고 비아냥거리곤 했는데 그건 딱 맞는 말이었다. 전학간 낯선 학교에서도 수업시간에 일어난 책을 읽을라치면 무릎이 떨리고 손이 흔들렸다. 게다가 내가 다니던 학교보다 진도가 훨씬 앞서 있었으니 행여 모르는 글씨가 나올까봐 눈앞에 아는 글씨에도 자신이 없어지곤 했다.
그러던 나에게 담임선생님의 ‘독서왕’ 인증은 ‘빽’정도가 아니라 폼나는 12폭 병풍이 되어주었다. 놀려대던 친구들이 다음날부터 나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나는 내 주변에 모여드는 아이들에게 쉬는 시간마다 이야기를 해주었으니 말하자면 또래 동화구연가가 된 것이다. 집에서는 이미 형제들에게 한물간 것이었지만 침을 꼴깍 삼키며 집중하는 친구들은 나를 신나게 했다. 나는 친구들의 반응을 보아가며 상황묘사의 양을 늘리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였으니 내가 강연에서 청중들의 반응을 보아가며 즉석에서 어렵잖게 강연의 내용과 순서를 바꾸는 훈련은 이때부터 시작된 듯하다.
친구들에게 재미있게 동화구연
‘소심 대마왕’이 ‘당당 대마왕’으로
반 아이들 전체는 아니었지만 주변에 나의 팬들이 생겨나자 그 낯설고 두렵던 교실은 나의 홈그라운드로 변했다. 공간에 대한 감각은 얼마나 주관적인 것인지. 나는 교실을 활보하고 다녔다. 땅딸보라고 나를 놀리던 남자애들을 나는 시답지 않은 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자신감이었다. 이제는 그애들이 주눅들 차례였다. 고소해하는 여자애들의 눈짓을 에너지 삼아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교실에 만연하던 남자애들의 우월의식에 도발적으로 반항했다. 책의 효용이 재미에만 있는 게 아님을 실감하면서 여자애들일수록 책을 많이 읽혀야 한다고 하신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자 책은 나에게 더욱 귀중한 것이 되었다.
책을 많이 읽은 것은 매사에 당당할 수 있게 해 주었고 국어시간을 넘어 학교생활 전반을 풍요롭게 했다. 동화대회, 읽기대회, 웅변대회를 통해 나는 타고난 소심증을 극복할 수 있었다. 오늘날 내가 무대공 표증 없이 적게는 100여명 많게는 3000명 청중 앞에 설 수 있는 저력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좋아하는 책을 읽고 나의 느낌을 표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독후감은 크게 애쓰지 않고 써도 늘 상을 안겨주었다. 나의 중학 시절 체육선생님께서는 단거리, 곧 100미터 달리기의 중요성을 수업시간마다 강조하셨다. 구기종목이라 할지라도 단거리 달리기 실력이 기본인 것은 축구는 물론이고 농구, 배구, 배드민턴, 탁구 등도 뛰어가서 공을 잡아야 이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말을 잘 쓰거나 하는 데 있어서는 독서가 바로 이 100미터 달리기에 해당한다. 말이나 글이나 우선 내용을 채울 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책이 밑천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말을 잘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바로 이것이다. ‘책을 많이 읽으세요.’
오늘날 말로 먹고살고 그 말을 고스란히 풀어서 책으로 먹고사는 나는 이 모든 것의 뿌리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의 독서라고 믿기에, 숙제를 안 해도 그만, 시험을 못 봐도 그만이면서도 유독 책을 많이 읽게 해주신 아버지께 깊이 감사드린다.
여성학자. 방송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