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명 : 경남신문

날  짜 : 2007. 6. 25(월)

<인간(人間)이라는 독립어>

몇달 전, 잘 아는 분이 절박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사고로 치아가 모두 손상되어 일상이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막대한 치료비를 본인이 해결할 능력도 못되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면서 다쳤기 때문에 보상받을 길도 없는 안타까운 처지였다.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뜻밖의 전화가 걸려 왔다. 한국전력 진해지점에서 직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금하여 치료비 일부를 지원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믿고 찾아가서 어렵게 운을 떼도 무안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생각하지 않은 곳에서 도움을 주겠다고 제안해 여간 고맙지 않았다. 우연한 자리에서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며 연락해 온 한전진해지점은 소외된 기관이나 이웃을 찾아 정기적으로 지원, 봉사하며 지역의 문화사업을 위해 직원들이 갹출하여 후원한다고 했다.

 그것은 공기업의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로 당연시 여길 수도 있지만 사회적 책임감만으로는 쉽게 실천할 수 없는 일이다. 우선 리더의 올바른 철학과 노사(勞使)화합이 잘 이루어져야 하고,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이 응집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전진해지점에서 지원받은 치료비를 들고 찾아 간 치과에서도 나머지 비용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 순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한 크고 작은 감격과는 매우 색다른 감동을 느꼈다. 그것은 진학, 결혼, 출산과 같은 개인적인 경사와는 사뭇 달랐다. 좀 더 스케일이 크고 부피가 나가는 묵직한 감동이며 참으로 따뜻한, 그래서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이라는 사실이 그대로 기쁨이며 감동으로 전해져 왔다. 이것이 곧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는 사람다움의 삶이 아니겠는가. 사람은 언제나 혼자인 듯하지만 이렇게 여러 손길이 모여 도움을 주고받으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줄잡아 2만명 정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한다. 열매 하나를 익히기 위해 스무 장에서 스물다섯 장쯤의 이파리를 필요로 하는 배나 사과에 비하면 연비가 엄청나게 낮은 편이다. 입는 옷, 먹는 음식, 찾는 정보, 타고 다니는 자동차 등, 한 아기가 서가(書架) 틈에 쪼그리고 앉아 책 속에 펼쳐진 세계로 몰입하게 되기까지만 헤아린다고 해도 도서관 내에서 이루어지는 도움의 손길이 수백 명에 이른다.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는 도서 가운데 양서를 골라 목록을 작성하고 그 책이 서가에 꽂히는 동안에 거치는 20여회의 기본 과정을 비롯하여 책에 흥미를 갖게 하는 프로그램 운영을 위해 요구되는 손길은 끝이 없다. 더구나 어린이 전문 도서관이라 청결과 안전을 위해서도 쉴 틈 없이 쓸고 닦고 따라다녀야 한다. 하물며 살아가는 전 과정임에랴.

 사람이 사람을 떠받쳐 주는 형상인 사람 인(人)자에는 사람 사이의 진면(眞面)을 꿰뚫어 본 선조들의 혜안이 배어있다. 더 무릎을 치게 하는 것은 인(人)이라는 글자보다 인간(人間)이라는 낱말이다. 사람 인(人)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한 듯, 사이 간(間) 하나가 더 붙어야 사람을 의미하는 독립어가 된다. 사람의 사람다움은 사람과 사람이 긴밀하게 맞물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완성된다는 것일 게다. 잡초 밭에 떨어진 보리 씨앗도, 콩밭 한가운데 돋아난 밀 이삭도 유용한 양식이 되지 못한다.

 보리는 보리끼리 사람은 사람끼리 어우러져 익어갈 때 쓸모 있는 무엇이 되는 것이다. 공간의 아름다움이 사물의 크기와 놓여있는 위치 그리고 다른 사물과의 간격과 같은, 주변의 조응(照應)관계에 의해 결정되듯이 사람의 사람다움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의해 비롯되고 완결되는 것일 게다.

 미국은 사회 전체가 1년 동안 자선 기관에 자발적으로 내놓는 금액이 국민 총생산의 12%에 이른다고 한다. 이런 자발적인 사회 기금의 힘이 개인주의와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 발생하는 소외 계층을 아우르며 발전해 나가는 근간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이 몹시 부러웠다. 그러나 이번 일을 겪으면서 우리도 그런 멋진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며 `人間'이라는 낱말의 깊은 뜻을 되새겨 본다.

경남신문:
http://www.knnews.co.kr/?cmd=content&idx=637071&searchword=%B5%B6%B8%B3%BE%EE